'2012/07'에 해당되는 글 11건

  1. 2012/07/30 믿음의 크기에 관하여
  2. 2012/07/26 복음의 텔로스 (1)
  3. 2012/07/23 그리스도들인이 세우는 세 가지 담
  4. 2012/07/19 설교가 지닌 한계
  5. 2012/07/16 야웨의 궤(櫃)의 행방 (1)
말씀 속에서2012/07/30 03:18


프롤로그 | 공(空) 


공(空), “비었다”고 하는 이 글자의 뜻이 지닌 형식은 그 자체가 태생적으로 부정적 입니다. 강력한 부정을 구사합니다.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기 때문입니다. 존재론적이고도 가치론적인 그 모든 술어와 속성을 부정하는 말로서 일상에서는 덧없음의 형식으로도 나타납니다. 인도 철학은 이미 이 부정어를 통해 비로소 그 술어들과 속성이 자유롭게 되는 절대적 존재의 방식이라고 가르칩니다. 그들 말로 슌야(śūnya), 즉 부풀어 그 속은 텅 비어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것이라는 이 개념은 사실 사람이 실제로 입증할 수 없는 개념이었지만 인도 수학은 제로(0)라는 수의 이치를 발견함으로써 그것을 입증했습니다. 특히 그것은 부정을 통한 긍정 혹은 상대를 부정함으로 절대 직관을 의도하려는 일단의 ‘종교’로 설파되기도 했습니다. 이 <공>을 이(理)로 번역하는 학풍이 있는데 그것을 void(공허)가 아닌 absolute(절대)로도 번역한다는 점에서 이데올로기 일면으로까지 파급됩니다.
반면에 그리스도교에서는 절대 악을 규정할 때 바로 이 <공> 즉, 모든 무적(無的)인 것을 - 모든 ‘없다’는 개념을 - 악으로 정의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없는 곳이 없으시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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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빈 공간(空)에 관한 문제에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가졌습니다. 니체는 이 ‘비어있음’을 가능성이라고 가르침으로 적극적으로 허무를 향해 파고들었고, 프로이트는 그 ‘공’이라는 표현 대신에 ‘욕구’라는 말을 써서 마치 이 세계가 욕구라는 충동이 만들어 낸 공간인 것처럼 묘사했습니다. 이들은 자기 나름대로 그 공백과 실존 세계의 연관성을 밝혀내는데 종사한 면이 있지만 사람들의 불안감을 자극 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 공간을 통해 오직 믿음을 산출해야 합니다.

프린서플 | 믿음의 크기에 관하여

그러나 또한 그리스도인은 이 공간을 인위적으로 채워서는 안됩니다. 성서는 이 빈 공간의 용도를 그리스도의 사랑의 자리로만 밝히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이 공간은 믿음으로 그리스도의 사랑을 채우는 공간이지 자기 믿음을 채우는 공간이 아닌 것입니다. 특히 이 공간은 너비와 길이와 높이, 그리고 깊이로서 명확하게 존재하는 장소인 동시에 그 크기를 다음과 같이 잴 수 있습니다.

첫째, 믿음의 너비 입니다.

공간 구성을 할 때 너비라고 하는 요소는 “많다”도 “넓다”도 아닌 개념이지만 (믿음에 관한한) 차라리 후자에 가깝습니다. 너비는 넓음을 구성하는 요소이지 적어도 많음을 구성하는 요소는 아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너비는 <결신>과도 같은 속성으로 제안될 수 있습니다. 다윗이 야웨의 궤에 관심하여 결국에는 성전을 짓겠다고 하는 다짐, 이것이 바로 너비에 해당하는 믿음의 형식이라 하겠습니다. 우리에게 어떠한 결신도 없다면 그것은 공간의 가장 기본 단위인 너비가 확보되지 않은 것과도 같습니다.

둘째, 믿음의 길이입니다.

길이는 그 공간(입체)이 갖는 시작에서 끝에 이르는 ‘과정’으로서 단위에 해당합니다. 그렇기에 이 길이라는 단위는 너비와는 달리 시간 개념과도 연관을 맺는 것입니다. 시간 개념은 믿음의 속성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단위입니다. 시간적 요소가 - 오래 참음과 같은 - 결여된 믿음은 아예 그 기본 기능으로부터 실격된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평생에 필적들이 있었습니다. 사울, 그리고 압살롬, 그 파란만장한 세월을 살면서 결국에는 길이를 모두 채우는 모습을 봅니다. 이것이 믿음의 길이입니다.

셋째, 믿음의 높이입니다.

사실 높이와 깊이는 같은 개념인데 본문에서는 이 둘을 분리하여 공간의 단위로 산입하고 있습니다. 높이가 깊이와 다른 점은 무엇입니까? 엄밀한 의미에서 이성적으로는 같을 수 있겠지만 전혀 다른 개념입니다. 단적으로 그 차이를 가르는 예는, 한 마디로, 높은 자리에 앉아 있는 자는 그 높이를 알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위로는 자기 말고는 없기 때문입니다.

넷째, 믿음의 깊이입니다.

반면 깊이의 예는 이것입니다. 제 아무리 부모를 헤아리는 마음이 큰 자식도 부모가 자식을 헤아리는 만큼을 넘어설 수는 없습니다. 그와 같이 우리가 아무리 하나님을 섬기고 헤아린다고는 하지만 그 분이 우리를 헤아리는 것을 넘지는 못합니다. 이때에 깊이라는 단위를 씁니다. 또 다윗의 경우 비교적 여유로운 시절이 찾아왔을 때 우리아의 아내를 범하고는 그 후속 조치로 일련의 계략을 펼칩니다. 자신의 아이를 임신한 밧세바와 그 남편이 동침케 시도한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의 <깊이>는 야웨의 궤를 전장 야전에 두고 집안에서 아내와 안락하게 지낼 수 없다는 우리아의 <깊이>에 지고 맙니다.


에필로그 | 유일한 그 공간의 용도

이와 같은 형식을 통해서 우리는 믿음의 너비와 길이와 높이를 잴 수 있습니다. 이 때 여기서 쓰이는 메코스(길이), 플라토스(너비), 휘포스(높이)는 바로 노아의 방주의 크기를 하나님께서 계시하실 때 사용되었던 단위입니다.

파스칼의 표현인 바, 이 공간은 오로지 그리스도의 사랑을 채우는 자리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헛된 ‘가능성’과 ‘욕구’를 채우려다가 종국에는 파멸을 맞으며, 그리스도인이라 하더라도 ‘자기 믿음’으로 그곳을 메우려는 이들은 후일에 그것이 ‘욕망’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지나간 시간을 아쉬워하기도 합니다.

  

미문(美門)교회 11시 예배 설교요지
2012년 7월 29일 성령강림 후 제9주
본문, 엡 3:14-21.
 (c.f. 삼상 11:1-15; 시 14; 요 6: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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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상 속에서2012/07/26 22:43

“그리스도께서 율법의 <텔로스>가 되셨다”고 하는 롬 10:4의 <텔로스>는 “완전히 끝났다”고 하는 의미와 “완성이 되었다”고 하는 두 의미를 지닌 오랜 신학적 논쟁 주제였다. 그런데 율법에 관한 <텔로스>가 그러했던 것처럼 복음 또한 현대인들의 입에서 퍼뜨려나갈 때 두 의미 색을 띠는 <텔로스>가 돼 가는 것같다.

그러나 하나님이 성서에서 드러낸 <텔로스>의 관성과 역학은 그것이 반드시 “새로움”이라는 주제 속에서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새로움이라는 모티프가 없이는 그 어느 곳에서도 <텔로스>가 지닌 진정한 어의는 결코 실현되지 않는다. 쉽게 말하면 “새로움” 즉 “희망”이라는 주제를 벗어나서는 복음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것이 종말론이든 무엇이든 “끝장났다”는 식의 - 혹은 끝장날 것이라는 식의 - 전파는 복음으로 규정지을 수 없다. 그것은 끝장이 안날 것이 때문이 아니다. 내일 아니, 지금 당장 이 순간에 그 끝이 임했다 하더라도 희망을 말해야 하는 것이 복음의 숙명이기 때문이다. 즉 그리스도의 이름을 지닌 자들이나 복음을 받아든 자는 숙명적으로 희망으로부터 벗어나려야 벗어날 수가 없는 존재들인 것이다.

복음 전파자의 특색은 희망을 끼치지 불안을 끼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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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 속에서2012/07/23 06:59

프롤로그  만리장성  

B.C 246경 중국에 영정이라는 소년이 왕이 되었습니다. 섭정을 받던 그는 장성한 후 섭정 무리를 척결하고 친정 체제를 구축하여 천하통일을 꾀합니다. 우선 가장 약한 한나라부터 멸망시켰습니다. 다음 조나라(228년), 위(225), 초(223), 연(222), 그리고 제나라까지(221), 마침내 39세 나이로 중국을 통일합니다. 왕이라는 칭호가 자신에겐 맞지 않다고 생각한 그는 삼황오제라는 말에서 ‘황’과‘'제’를 따 황제라 칭하고, 자신은 처음이니 시황제(始皇帝)라 부르도록 했습니다. 이가 바로 진시황입니다. 그는 아방궁을 위시한 무리한 토목공사 강행과 대규모 문화탄압사건(분서갱유)으로 중국 사상 최대 폭군으로 불리지만 분열된 중국을 통일하고 2천년 왕조의 기본틀을 닦은 인물입니다. 만리장성도 유명합니다. 그가 150만 여명을 동원 시킨 이 공사에서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고 전합니다. 그러나 이 긴 성벽을 대체 왜 축성했는지는 아직까지도 알려지지 않고 있습니다. 북방 흉노의 침임 때문이라고는 하지만 이 성이 실제 그들을 효과적으로 막을 수 있었다고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입니다. 평생 불노초를 찾아 헤맨 것으로도 유명한 그는 불과 49세로 죽습니다. 사실 그 보다 평균 두 배는 더 사는 우리들은 그가 볼 때 불노초 먹은 사람들 아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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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린서플 | 그리스도인들이 세우는 세 가지 담

예수님께서 자기 육체로 허물려고 했던 - 이미 허무셨지만 어떤 자들에게는 여전히 존재하는 - 담은 다음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첫째, 천국과 지옥 사이의 담입니다.

천국과 지옥은 관념적 장소가 아니라 육체와 관념 모두로써 인식되는 곳입니다. 특히 천국은 우리가 반드시 들어가야 할 궁극적 귀착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그 이름으로만 들어갈 수 있고 다른 방도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런 식으로 행동하는 너희가 가는 천국이라면 함께 가고 싶지 않다”고 누군가 말한다면 무엇이 잘못된 것입니까? 천국이 잘못된 것입니까? 이슬람의 천상계는 살아생전 공로 있는 남성들의 경우 - 예를 들면 종교적 열심의 자살 테러 - 원하는 만큼의 여성들과 같이 살 수 있는 곳입니다. 여성들은 그런 천국엔 안가려 할 것입니다. 우리의 천국이 여전히 담이 쳐져 있다면 그것은 우리의 그릇된 행동 양식과 그에 따른 천국의 설명일 것입니다.

둘째, 교리라는 담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가만히 덕을 쌓고만 있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구체적으로 그분의 행실과 태도를 소유해야 합니다. 세례(침례)가 그것입니다. 성만찬이 그것입니다. 교회라는 곳은 세례와 성만찬을 위해 가는 곳이지 다른 이유로 가는 곳이 아닙니다. 이 중요한 교리 말고 다른 무엇이 더 중요합니까?  그러나 이 교리는 의식과 예전이라는 미명 아래 교파적 교리보다 부차적 수준으로 격하되어 단지 천국으로 가는 일종의 수속으로 자리해 있거나, 성장 테크닉에 가려 있습니다. 담을 형성하는 교파적 교리나 성장 기술 프로그램은 본문에서 지탄하고 있는 ‘손으로 행하는 할례’에 지나지 않습니다. 벤저민 프랭클린은 사람들이 운집하는 어떤 유명한 목사의 집회에 참석해보고는 “저 목사가 나를 장로교인으로 만들려고 한다”고 말하고는 두 번 다시 그곳에 안갔다고 일기에 기록합니다. 프랭클린이 신심이 부족해서 그런 말을 했다고 보이지는 않습니다.

셋째, 빈곤이라는 담입니다.

배금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구원은 빈곤으로부터의 구원이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빈곤을 안 느끼는 사람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구원은 요즘 <절대적 빈곤>과 <상대적 빈곤>으로 분류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습니다. <절대적 빈곤> 퇴치를 사역기치로 하는 한 분의 말씀을 기억합니다.
떡은 중요합니다. 그러나 떡이 전부는 아닙니다. 그래서 저는 절대적 빈곤의 퇴치를 위해서는 무모하리만큼 도전하려고 하지만 상대적 빈곤의 문제까지 해결하려고 나설 마음은 없습니다.
<상대적 빈곤>에 처해있는 자들의 빈곤 문제를 배부른 자들의 나약해 빠진 푸념 정도로 간주하는 것은 그릇된 진단이라는 입장이 저에게 있습니다. 왜냐하면 산업혁명 이후의 인류 빈곤은 전적으로 상대적 가치가 만들어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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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그것이 상대와 상대 사이의 ‘담’을 주도하며, 그리고 그것이 결국에는 절대빈곤에까지도 맹위를 떨치게 되는 것이고, 그렇기에 ‘빈곤’ 그 자체보다도 선행된 악을 우리는 ‘사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사이’가 바로 본문에서 지목하는 ‘담’입니다. 십자가가 허물고 평화를 세우려 했던 것도 이 벽들이며, 이 벽이 또한 그것을 도리어 방해하기도 합니다.


에필로그 | 담을 허무는 방법 

우선 진시황이 친 벽인 만리장성을 칭기즈 칸이 허물 때에 쓰는 방법이 있습니다. 성벽에서 잘 보이는 위치에서 큰 가마솥에 기름을 끓이고는 포로들을 그곳에 집어넣었다고 합니다. 성벽 위에 있던 자들이 그것을 보고 겁먹는 바람에 사기가 꺾여 그 담이 붕괴되었다는 얘기 입니다. 그리고 로마제국의 군대는 공병의 공성전으로 유명합니다. 아무리 높고 강한 성벽도 그 곁에다가 같은 높이로 공성을 하여서는 거기서 상대 성벽 담을 공략하는 전법이었습니다.  
 
끝으로 본문의 저자 바울의 방법이 있습니다. 그는 ‘가정으로’ 제국들과 모든 세계의 담을 무너뜨렸습니다. ‘종교로’ 담을 허문 게 아닙니다. ‘가정으로’ 허문 것입니다. 로마서의 마지막 장에는 당시의 하우스쳐취 규모를 추정할 수 있는 명단이 나오고 있습니다. 몇 되지도 않은 가정이 로마제국의 담을 넘어선 좋은 예입니다. 로마제국뿐 아니라 진시황과 칭기즈칸의 나라들은 바울의 그것보다 결코 오래 가지 못했습니다.

‘종교’가 아닌 ‘가정’으로 담을 붕괴시켰다는 것은 매우 아이러니 한 일입니다.
미문(美門)교회가 하우스쳐취라서 드리는 말은 아닙니다.


미문(美門)교회 11시 예배 설교요지
2012년 7월 22일 성령강림 후 제8주
본문, 엡 2:11-22.
 (c.f. 삼하 7:1-14a; 시 89:20-37; 막 6:30-34, 5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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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상 속에서2012/07/19 23:26
교회가 시작된 이후로 줄곧 설교 본문을 성서일과(Common Liturgy)라는 것에 의존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평신도들 가운데는 이런 것이 있는 지조차도 모르는 분들이 적지 않지만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 임의 본문을 삼가고 있습니다.

한 주간 속(俗)에 거하다가 지쳐서 교회 오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이라 하고서 사람의 입 타고 나오는 말을 들려줘야 하는데 그것이 일개 개인 자의로 선택된 것이라면 그것이 과연 얼마나 대언력을 갖출 수 있을까 하는 마음에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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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박학다식하고 성서 지식이 남다른 목사라 하더라도 그가 구사하는 언어의 캐시 용량과 능력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비유가 좀 그렇습니다만, 이 세상에 동물들의 종류가 그렇게 많은데 사자나 표범 이런 건 다 빼고서 쥐나 뱀 따위의 십이 간지만 가지고 사람 운수를 진단하는 한계와 같은 것입니다.  

무슨무슨 세미나나 성장 기술에 사로잡힌 사람의 언어 캐시에는 그 어휘들만 들어 있습니다. 2-3주간 읽은 책의 어휘에 그 모든 캐시가 사로잡히는 이치입니다. 우리들의 성도들은 2-3년 전에 써먹은 설교까지 모두 기억하고 있습니다. 심지어는 특정 성도들을 향해 표적 설교를 하는 경우도 지겹도록 보아 왔습니다.

일장일단은 있겠으나 내가 임의로 선택한 본문이 아닌, 철저하게 교회력에 입각한 검증된 본문 위에 설교자 자신도 함께 올라섰을 때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정합성이 몇 갑절은 더 상승된다는 장점이 그 모든 단점을 상쇄하고 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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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개신교는 설교라는 도그마로 그 얼마나 성서 위에 군림해 왔는지, 깊은 반성을 해야 할 시점에 오지 않았는가 하는 자성과 함께 하르낙(Adolph von Harnack)의 역작 History of Dogma(1885) 중 한 소절을 떠올려봅니다.

...도그마는 모든 교회의 배경에 있어 왔다. 동방교회는 제의의 공간적 측면을 강조했고, 서방교회는 교권적 측면을, 그리고 개신교회는 복음서 본질을 추구하는 측면에서 그러했지만 역설적인 것은 개신교회들이 가장 후대 멀리에 위치해 있으면서도 그 이점으로 도그마들을 일시에 제거하는 데 아무런 문제될 게 없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여기에 와서 그것은 자신의 취향에 따라 직접적으로 말하는 방식의 설교라는 도그마로 치환되어 와 있게 되었다. 카톨릭 교회는 그런 식으로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르낙은 도그마가 복음을 방해한다는 입장에서 이런 진술을 한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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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 속에서2012/07/16 07:21


프롤로그 | 인디아나존스: 잃어버린 성궤

1981년 <인디아나존스: 잃어버린 성궤>가 발표된 이후 성궤의 실존에 관심이 고조된 적이 되었습니다. 이미 1913년 성궤를 찾아 떠난 고고학자가 존재했던 사실이 이 영화로 재고되었기 때문입니다. 사료 속에서 “성궤는 이스라엘에서 이집트로 옮겨졌다”는 단서를 잡고 카이로에 거처를 잡은 그는 기록을 탐독하던 중 성궤 운반 시간대를 대조해 “성스러운 금괴는 시오니 제국(현재 에티오피아)으로 옮겨졌다”는 문장을 찾아내 에티오피아까지 들어갑니다. 그러나 그는 대학 친구에게 보낸 1919년9월13일자 편지를 마지막으로 행방불명됩니다. 친구는 그를 찾아 에티오피아까지 와서 ‘악섬’이라는 지역에서 에티오피아 정규군 복장이 아닌 이상한 복장에 창을 든 경비병들을 발견합니다. 그리고는 악섬의 지도자로부터 “네 친구는 성스러운 곳을 들어갔다가 천벌을 받아 죽었다.” 라는 말을 듣습니다. 그는 친구의 시신 수습을 위해 한 지하교회를 찾아갔다가 그곳서 ‘천벌을 받아 죽었다’는 수많은 유골들과 함께 구부린 채 죽어있던 자기 친구를 발견합니다. 그리고는 실제로 솔로몬 왕으로부터 위임 받았던 성궤가 악섬의 20여개의 지하교회들 중 어딘가 한 곳에 숨겨져 있다는 비밀을 전해 듣게 됩니다. 여러 분은 이 이야기를 믿으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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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린서플 | 야웨의 궤(櫃)   

본문에서는 다윗이 매우 위험천만한 일 하나를 시도하는 장면이 묘사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역사상 지금까지 모든 신앙의 초점이었던 ‘하나님의 궤’를 특정 지역으로 이동시키는 작업을 하려고 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 작업 도중에 그만 웃사라는 사람이 부주의로 죽는 사태가 발생합니다. 이 사건 속에서 우리는 이 성궤에 얽힌 다음 세 가지를 유념할 필요가 있습니다.

첫째, 성궤(법궤)를 중심한 신앙은 터부인가 믿음인가.

성궤는 요단강 강물을 끊는 능력이 있었습니다(수 3:13). 뿐만 아니라 여리고라는 철옹성을 함락시키는 능력을 발휘하기도 합니다(수 6:16). 그리고 엘리 제사장 말기에 가서는 이 성궤를 블레셋 사람들에게 빼앗겼던 적이 있는데, 당시 성궤 스스로가 그들의 우상의 머리와 손목을 끊고 그 스스로가 이스라엘로 돌아오는 기이한 힘을 보여준 바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신비롭고 신성한 힘의 근원이 과연 터부 신앙에 반응하는 것인지 아니면 믿음 신앙에 반응하는 것인지, 이것이 이 본문이 갖는 핵심입니다.

둘째, 성궤로 인한 저주가 복으로 바뀌는 시점은 언제인가. 

성궤를 이동 시키다가 발생한 불상사로 겁을 먹은 다윗은 그것을 오벧에돔이라는 사람의 집에 두게 했습니다. 오벧에돔은 어떤 사람이었을까? 왜 오벧에돔의 집에 복을 주셨을까? 웃사는 만졌기 때문에 저주 받았고 오벧에돔 은 만지지 않았기 때문에 복 받은 것일까? 웃사는 단지 뛰는 소 때문에 궤가 떨어질까 봐 붙든 것뿐인데 왜 그는 죽고 오벧에돔은 복을 받았을까? 물론 ‘웃사는 죄 있었고 오벧에돔에게는 없었고’ 라는 식이면 그만이겠지만, 오히려 오벧에돔이 정통 레위지파였을 가능성은 거의 없습니다. 그는 이방인이었던 것입니다. 여기서 관심해야 할 중요점은, 하나님께서 성궤가 그 집에 머무는 동안 전혀 저주가 없었고 도리어 복 받은 것으로 타인의 이목에도 띄었다는 점에 있습니다. 즉, 오벧에돔 집에 머무는 동안 성궤에 대한 터부가 해제되었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 터부의 완전한 해제는 다윗이 그 궤 앞에서 하체를 드러내고 춤 춰도 (웃사처럼) 급사하지 않는 담대함의 예배로 드러납니다. 이를 질타하는 미갈이 오히려 터부에 걸립니다. 그리고 다윗의 그 시도적인 찬양과 오벧에돔의 직책이 다름 아닌 찬양이었다는 사실은 이 성궤의 터부 해제와 긴밀한 관계를 맺습니다. 이것이 바로 다윗의 예배가 갖는 의미입니다.

셋째, 성궤의 행방은 어디로 갔는가.

오벧에돔이 석 달간 받은 복은 석 달로만 끝나지는 않았던 것같습니다. 세례 요한의 목을 친 헤롯 왕이 에돔의 자손이라는 점을 상기할 때 그 복은 나름대로 유구했던 것같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 복이 복의 재생산으로 이어지는 지 아니면 새로운 터부로 재생산 되는 지, 그 지점에 성궤의 행방이 감춰져있다 하겠습니다. 바로 여기에 다윗이 받아낸 약속의 영원함, 곧 성궤의 행방이 담겨져 있는 것입니다. 


에필로그 | 어디에도 없다는 어디에든지 있다

성궤는 영어로 the Ark입니다. 노아의 방주도 Ark라고 부릅니다. 구별된 에덴동산도 일종의 Ark였습니다. 솔로몬 성전도 Ark일 수 있습니다. 성전 되신 예수님의 몸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노아의 방주를 찾을 수 없는 것처럼 에덴동산도 성전도, 예수님의 육체도 또 그의 무덤도, 그리고 성궤도 찾을 수 없습니다. 어디에도 없다는 말은 어디든지 있다는 개념으로 치환됩니다.

엄밀한 의미에서는 흑암 속에서 빛으로 틈을 벌린 이 지구도 일종의 알, 즉 Ark였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 지구를 성궤로 인정하지 않는 이치에서 그 성궤의 행방을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미문(美門)교회 11시 예배 설교요지
2012년 7월 15일 성령강림 후 제7주
본문, 삼상 6: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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